포스테키안

2017 봄호 / POSTECH essay / 이충형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2017-05-24 873

수학, 과학 시간에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던 것

수학, 과학 수업을 들을 때 혹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혹시 못했던 적이 있나요? “수, 집합, 점, 벡터 같은 것들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아니면 그것들은 단지 상상의 산물이나 기호일 뿐인가?”, “수학이 대체 왜 과학에 이토록 유용한 것인가? 우주의 근본 질서가 수학적이기 때문인가?”, “전기장이나 자기장이란 정말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맞는 예측을 끌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시간 여행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던지고 대답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예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집합은 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으로 중학교 1학년 때 배우지요. 집합과 원소를 구분하고 집합이 그 원소로 정의된다는 점과 합집합, 교집합 등 집합의 연산에 대해 배웁니다. 그런데, 정작 집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교과서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집합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집합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요? 그럼 물어 보겠습니다. 사람들로만 이뤄진 집합은 사람인가요? 예라고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나요? 대략 70억 명이라구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집합이 사람이라면, 훨씬 더 많은 수의 사람이 있습니다. 영희와 철수로 이뤄진 집합 {영희, 철수}가 사람이라면 {영희, 철수}는 영희도 아니고 철수도 아닌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집합이 사람이라면 {영희, 철수, {영희, 철수}}는 영희도, 철수도, {영희, 철수}도 아닌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영희를 유일한 원소로 갖는 집합 {영희}는 그 원소인 영희와는 다르다는 것도 아시죠. 따라서 집합 {영희}가 사람이면, 영희와는 다른 사람이 됩니다. 또 집합 {영희}가 사람이고 사람의 집합이 사람이면 집합 {영희}를 유일한 원소로 갖는 집합 {{영희}}는 또 다른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집합이 사람이면 이 세상에는 사람이 무한히 많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이 무한히 많다고 보고 다른 믿음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모순을 피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해봤자 이득은 없고 사고와 소통의 혼란만 생기므로 사람의 집합은 사람이 아니라고 보는 게 훨씬 더 낫습니다. 사람의 집합이 사람이 아니라면 그럼 뭘까요? 집합은 구체적인 모습을 갖고 있지 않은 추상적 개념입니다. 임의의 여러 대상들을 하나로 여기는 사고 과정을 통해 이해되는 개념이지요. 세상에 무엇이 존재하는가가 보이고 느껴지는 것과는 다르게 파악될 수 있다는 점을 교과과정 상에서 처음으로 보여주는 주제가 바로 집합입니다. 집합 개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얻게 된 추상적 존재에 대한 이해는 여러분이 앞으로 계속해서 더 깊은 공부를 하는 데에 꼭 필요한 초석이 됩니다.

수와 숫자를 구분하는 것도 오류를 피하고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다음의 논증을 살펴봅시다.

(1) 고려의 첫 번째 왕은 태조 왕건이다.
(2) 태조 왕건은 서기 877년에 태어났다.
(3) 그러므로 고려의 첫 번째 왕은 서기 877년에 태어났다.

위의 논증에서 (1)과 (2)가 참이라면, (3)도 참이어야만 하지요. 반면, 다음의 논증에서 (4)와 (5)는 참인 것으로 보이지만, (6)은 거짓으로 보입니다.

(4) 1/2은 2/4이다.
(5) 2/4의 분자는 2이다.
(6) 1/2의 분자는 2이다.

(1)-(3)으로 이뤄진 논증과 (4)-(6)으로 이뤄진 논증은 완전히 형식이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왜, (1)과 (2)가 참이라면 (3)도 참이어야만 하지만, (4)와 (5)는 참이지만 (6)은 거짓으로 보일까요?

이 질문을 하면 많은 분이 1/2과 2/4가 완전히 같은 게 아니다, 그 둘은 다른 수라는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1/2과 2/4 모두 0.5라는 실수입니다. 고려의 첫 번째 왕과 태조 왕건이 동일인이듯이 1/2과 2/4는 같은 수입니다.  이제 “이충형은 사람이다.”라는 문장과 “이충형은 세 글자다.”라는 문장의 차이를 생각해 봅시다. 앞의 문장에서 ‘이충형’이라는 표현은 사람 이충형을 가리킵니다. 반면 뒤의 문장에서 ‘이충형’은 ‘이충형’이라는 표현을 가리킵니다. 즉, 같은 표현이 어떤 문장에서는 자연의 대상을 가리키고 다른 문장에서는 그 표현 자체를 가리킵니다. 이충형이라는 사람과 ‘이충형’이라는 이름이 다르듯이, 수와 숫자는 다른 개념입니다. ‘팔’, ‘8’, ‘여덟’은 모두 같은 수를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가령, 아라비아 숫자 ‘8’이 좌우 대칭의 모양을 가지고 있듯이 숫자는 모양이 있지만,  수는 추상적 존재로 모양이 없습니다.

핵심은 우리가 분수라고 부르는 것은 수가 아니라 숫자로 이해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에 분수인 실수는 없습니다. 0.5라는 실수가 분수인가요? 아니지요. 0.5가 분수로 표현된다고 할 수는 있는데, 분수로 표현된다는 말은 분수가 수가 아니라 이름, 즉 숫자라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1/2’이라는 표현은 ‘분수’가 아니라 ‘분숫자’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1/2은 수이므로 분자나 분모를 갖고 있지 않고 ‘1/2’이라는 표현 안에 위에 있는 숫자 ‘1’이 분자가 됩니다. 그리고 1/2과 2/4는 같은 수이지만, ‘1/2’과 ‘2/4’은 다른 숫자입니다. 마치 8과 팔이 같은 수이지만 ‘8’과 ‘팔’은 다른 숫자인 것처럼요. 따라서 (1)-(3)으로 이뤄진 논증과 (4)-(6)으로 이뤄진 논증은 형식이 다릅니다. (1)과 (2)는 모두 태조 왕건에 대한 진술인 반면, (4)는 수에 대한 진술이고 (5)는 숫자에 대한 진술입니다. 1/2과 2/4는 동일한 것이므로 대체 가능하지만, ‘1/2’과 ‘2/4’는 두 개의 다른 대상이므로 대체가능하지 않습니다. 언어 표현과 그 언어 표현이 지시하는 대상을 구분하는 일은 부처님 손가락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상을 구분하는 것만큼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물학 관련 얘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수정란에서 기원합니다. 아마 앞으로 금세기 안에 예외가 나오겠지만요. 생물학 시간에는 수정란에서 사람이 나오는 발생 과정을 배웁니다. 그런데, 생물학 시간에 다루지 않는 아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바로 ‘수정란은 사람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문제는 윤리적 함의가 아주 큽니다. 수정란이 사람이면, 수정란을 죽이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수정란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일은 사람을 가지고 실험을 하는 일이 됩니다. 수정란이 분열하여 2세포배가 되었을 때 둘로 나뉘면 일란성 쌍둥이도 자라날 수 있습니다(대개의 일란성 쌍둥이는 좀 더 자란 배아 단계에서 나눠진 경우입니다). 따라서 수정란이 2세포배가 되었을 때 둘로 나누고, 각각의 세포가 다시 2세포배가 되었을 때 또 각각을 둘로 나누어, 과연 몇 번을 더 나누어도 태아로 발생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을 하는 것은 여러 명의 사람 대상으로 실험하는 것이 됩니다. 수정란이 사람이면, 독립적인 성체로 발생할 능력을 갖춘 줄기세포도 사람으로 간주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수정란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수정란이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어느 단계의 배아부터 사람이 되는 것이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함부로 대해도 되는 것은 아니므로, 수정란이나 줄기세포를 이용한 실험을 어디까지 용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라구요? 생각해 봤자 머리만 아픈 문제라구요? 훌륭한 과학자, 공학자가 되는 데에는 도움이 안 되는 문제라구요? 아닙니다. 어려운 문제지만 좋은 답이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시면 포스텍에서 만나요.

글_이충형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