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20 가을호 / Creative Postechian

2020-10-20 179

얼떨결에 시작한 창업 후기 

 

적응 교육을 위해 포항에 도착해 처음 우리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던 날, 박사까지 최소 10년을 다녀야 하는 곳으로는 퍽 심심한 동네일 것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자고로 대학이라면 주변에 하나씩 있다는 번화가도 없고 칙칙한 대학 건물들을 실망감으로 바라보았을 때도, 이후 동아리 활동 차 강남의 스타트업 대표님들을 만나 그들의 무용담을 선망의 눈빛으로 들을 때도 제 천직은 연구이며 저의 젊음을 오롯이 학문에 투자해야 한다는 믿음에 흔들림은 없었죠. 그렇기에 그 시점으로부터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지금, 아이러니하게 친구도 가족도 없는 서울에서 휴학생 신분으로 스타트업을 창업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게도 가끔 낯설게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연락된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이런 저의 변신의 배경에 대단한 결단이 있을 거라고들 생각하는데요. 사실 사건의 전말은 그와 거리가 꽤 멉니다. 

저는 1학년 내내 이곳저곳 기웃거리기만 했을 뿐 동아리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다른 동아리들과 달리 활동비를 지급한다는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었던 교내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APGC-Lab의 신입 서포터즈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어요. 첫 학기에 참여한 대부분의 활동은 포스터 제작이나 행사 정리 등 크게 흥미를 느끼기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학기 마지막쯤 동문 창업가들의 인터뷰를 진행한 일은 그 당시 제게 꽤 강렬한 경험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 중 한순간에 본인의 선택을 믿고 단번에 방향을 틀어버린 사람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서 ‘뭘 믿고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씀하실까?’ 싶으면서도 한 편으로 ‘본인의 꿈을 본인 방식대로 이뤄나가는 일인데 하루하루가 얼마나 재미있을까?’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 다음 학기 APGC-Lab의 매니저로서 본격적인 창업 지원 프로그램의 기획에 참여하게 된 경험은 창업 생태계에 대해 조금 더 현실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요. 제가 맡았던 임무는 자금과 공간 지원을 포함한 단기 엑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의 기획과 운영이었습니다. 가장 속 썩였던 문제는 실제로 창업을 할 생각은 없으면서 그럴듯한 사업 계획서로 혜택만 차지하려는 얌체 같은 팀들을 골라내는 일이었어요. 사실 종전의 마인드로는 활동비만 받으면 되니 굳이 머리 굴리며 해결을 모색할 이유가 없었지만, 앞서 세상을 바꾸겠다던 창업자 선배들의 열정을 보았던 입장에서 그들의 소중한 기회가 낭비되는 모습을 볼 수 없더라고요. 

지금 플라스크를 같이 이끄는 공동 창업자 친구가 저를 찾아왔던 시기가 바로 이러한 문제에 골몰하며 학생 창업 생태계에 의구심을 갖던 시기였습니다. 같은 분반으로 처음 만났던 이 친구는 레드벨벳의 지독한 팬이었는데 대뜸 찾아와 본인이 팬 활동을 하면서 느낀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창업하고 싶다고 했어요. 가뜩이나 권모술수(?)로 얼룩진 창업 바닥을 경험하던 터라 나름대로 조언 차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어요. 오랜만에 정말 순수한, 또 자전적인 배경의 창업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저도 모르게 감정 이입이 됐죠. 이 친구가 본격적으로 창업을 준비하겠다고 불쑥 휴학해서 나타났을 때 처음으로 같이 일해 보면 뭐라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뭔가 시작할 마음은 들었지만, 여전히 얼마만큼 이 일에 투자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 자신과의 약속으로 그 당시 꽤 규모 있는 국가 지원 사업 선정을 목표로 3개월간 도전해 본 후 떨어지면 깔끔하게 포기하자고 정했었죠. 시험 기간이었지만 시험공부도 제쳐두고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다 보니 지난 3년간 학교생활을 하면서 쌓인 권태가 한 번에 해소되는 듯한 기분이 들더라고요(지금 생각해 보면 시험공부를 농땡이 피우는 재미였던 것 같기도 합니다). 기말고사가 끝난 뒤 본가나 여행지로 떠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저는 한 손에 사업 계획서를 든 채로 발표 평가를 위해 광주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오늘의 결과로 저의 20대 초반의 행로가 달라질 수 있다는 부담감 반, 버스 창문에 비치는 제법 사업가 같은 제 모습이 대견한 우쭐함 반으로 출발해 어떻게 발표를 끝냈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돌아오는 버스에 앉았을 때, 선정 여부와는 별개로 창업가의 삶을 살아야 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몇 주 뒤, 막상 선정 통보를 받고 나니 그제야 막막한 앞길이 보였습니다. 제출한 계획서의 내용은 어떻게 제작하며, 사무실과 집은 어디에 구하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 하나도 제대로 정해진 게 없었죠. 밤낮없이 매일 공동 창업자 친구와 전화하며 머리를 맞댄 결과 한 달여 만에 친구도 친지도 하나 없는 낯선 서울에 자취방을 잡고 공유 오피스로 출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창업 첫날부터 모험의 시작일 것 같던 생각과는 달리 현실은 지루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다음날 새벽까지 하는 일이라곤 누가 쓰기는 할까 싶은 프로그램의 개발과 약간의 서류 작업뿐이었어요. 스타트업의 대표라면 모름지기 투자자들 앞에서 멋있게 사업을 설명하고, 협상을 통해 큰 매출을 끌어내는 일을 한다고 상상했던 저로서는 그렇게 몇 달을 집-사무실만 오가며 묵묵히 개발만 하게 될지 몰랐죠. 솔직히 그 무렵 누군가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한다면 흔쾌히 과거로 돌아가 창업의 꿈을 깔끔히 접었을 것 같아요. 

캐리어 하나 끌고 서울역에 내렸던 날로부터 만 일 년이 된 지금, 저희 팀은 네이버와 유명 VC들로부터 투자도 받고 팀도 두 명에서 열 명 내외로 늘었습니다. 이제 막 일 년이 된 초기 팀으로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자부합니다. 단순히 수치적인 성취를 넘어서 제 적성도 이번 창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어요. 새로운 자극이 계속되어야 흥미를 유지하는 저이기에 새로운 이벤트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직업으로서의 스타트업 대표가 제 성향과 아주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요. 하지만 앞서 제가 창업을 시작하고 반년 정도는 너무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고 했죠? 저의 창업 스토리를 통해 알 수 있으시겠지만 그런 어려움을 사전에 잘 알고 있었더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사소한 결심의 연속이었어요. 더 고심하고 조심했으면 돈을 주고도 할 수 없었을 소중한 경험을 놓쳤겠죠. 그래서 제 창업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어떤 일들은 때로는 고민보다 시작이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중대해 보이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마음 가는 쪽으로 성큼 가보았을 때 예상치 못한 행운을 마주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어요? 

 

컴퓨터공학과 17학번 이 준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