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테키안

2021 봄호 / POSTECH ESSAY

2021-04-19 181

포스텍 교수님 이야기 

Making Rigid Soft 

딱딱한 세상을 부드럽게 

3월 후반으로 넘어가는 지금부터 5월 중순까지는 포스텍 캠퍼스가 연중 가장 예쁠 때이다. 여러 학교를 방문해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포스텍의 캠퍼스가 가장 자연 친화적이고 걷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매화는 가지 하나하나가 멋들어지게 뻗어 나가 벌써 단단하면서도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어제 보니, 일주일 내로 캠퍼스 곳곳에 벚꽃이 터질 것 같다. 리스트 3동에 있는 필자의 사무실 온 창문을 꽉 채워버릴 벚꽃 터널은 생각만으로도 카타르시스 가득한 판타지의 세계다. 현기증 날 정도로 알록달록한 영산홍, 그 뒤를 하나둘씩 이어받아 개화할 감나무, 꽃사과, 모과 등 다양한 과실수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물드는 캠퍼스를 산책하면서 열매를 따 먹고 차를 담가 먹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92학번으로 학부에서 박사 학위까지 10년을 포스텍에서 보내면서, 나에게 포스텍의 캠퍼스는 곳곳에 재미와 추억이 가득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안정감이 있는 곳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가 9년간의 연세대 서울 생활을 접고, 포항으로 내려온 큰 이유이기도 하다. 

자연 친화적인 삶이 좋은 나의 입장에서 휴대폰, 랩탑, 각종 디스플레이, 센서들을 포함하여 주변에 넘쳐나는 인위적인 딱딱한(높은 기계적인 모듈러스를 가진) 전자 장치들은 부드럽고 형태 변화가 가능하면서도 복잡한 기능을 수행하는 자연의 습성과는 이질감이 느껴진다. 최근 높은 휴대성과 부착성, 효율적인 공간 사용이라는 실용적인 필요성 때문에, 딱딱한 전자 장치를 폴더블 Foldable 혹은 롤러블 Rollable처럼 유연한 장치로 바꾸는 연구가 한창이다. 현재는 전자를 기반으로 하는 소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단단한 반도체를 사용하고 있으나, 생명체의 신호 발생과 전달 메커니즘인 이온 기반의 부드러운 장치들이 조만간 실용화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Making Rigid Soft : 딱딱한 세상을 부드럽게!’. 나의 연구 주제이자 삶의 자세이기도 하다. 

나의 연구는 부드러운 소재와 소자를 만드는 것이다. 전자 기반의 소자에서는 형태의 변형이 가능한 반도체와 전극, 배터리를 개발하는 것이고, 이온 기반의 소자에서는 생체와 유사한 신호의 발생과 신호의 전달을 연구하여 인체의 감각을 복원할 수 있는 인공 피부를 만드는 것이다.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자 기기를 만들 수 있겠다는 기대감과 어쩌면 인류의 오랜 난제 중의 하나인 손상된 감각의 복원을 통해 장애인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학자로서의 소명을 안고 연구를 하고 있다. 

부드러운 삶을 살기 위해 판단 기준에서 유연성을 갖고, 예상치 못함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살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나 기관들은 판단이나 선택을 할 때, 음/양처럼 생각을 단순화할 수 있는 양극단의 모델을 설정하고자 한다. 우리가 그렇게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전 지구적인 사회/철학 문제에서 개인적인 문제까지 비슷한 접근이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사회를 순수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사회로 만들자고 주장한다면, 다들 화들짝 놀랄 것이다. 각 사회나 국가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어느 지점에서 각자의 상황과 철학에 맞춰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어느 기준점에 제도를 맞출 것인가에 따라 사회 복지 제도의 운용 방식과 자율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범위가 달라진다. 이번 COVID-19 상황에서 기준점의 설정에 따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났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사이에서 각 정부의 기준점에 따라, 다양한 대응 방식이 결정되는 것을 보았다. 덩달아 개인들도 집콕과 외식 사이에서 예전과는 확연히 다른 기준점 설정의 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양극단의 모델을 설정하고 그 중간 점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은, 근대 과학이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 줄기차게 취해온 방법론이면서, 인류가 현재까지 성공적인 기술 발전을 이루어 낸 원동력이기도 하다. 문제는 대부분의 과학적인 모델링에서 양극단의 성질을 선형적인 관계로 해석해서는 중간 지점의 성질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양극단의 근처에서는 선형적인 관계로 근사할 수 있으나, 중간 지점으로 갈수록 비선형적인 복잡성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 복잡성을 예측하고자 하는 노력이 많은 학문 분야로 정착되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 과정에서도 여러 사항을 고려하여 기준점을 정하려 노력하나, 불행히도 결과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과학적인 문제보다 훨씬 떨어진다. 따라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이나 태도의 범주 내에서는, 판단의 기준점을 지속적으로 재설정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름의 기준점에 근거해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나 추가적인 극단이 발생하면 판단의 기준점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그런데, 경험상 큰 희열은 예측 가능한 결과보다 예상치 못한 성취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과학 기술 발전의 원동력이다. 실험 도중 불쑥 튀어나오는 예상 못한 결과가 과학 기술에 큰 영향을 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직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다양한 인과 관계가 있으며, 이론적인 배경이나 과학적인 경험 속에 우리가 인식하지 못 하는 여러 가정들이 숨어 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과에 흥미를 갖고 새로운 시각에서 고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삶에서도 우연한 계기가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필자가 지금 교수로서 이 글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그러한 몇 번의 예상치 못함이 겹친 결과라 볼 수 있다. 대학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학부생 시절에, 우연히 시작한 연구참여의 경험을 통해 연구가 ‘재미있을 수도 있겠구나’하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고 대학원 진학의 계기가 되었다. 그 연구참여가 없었다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학 기술계에는 있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박사 과정에서 처음 참여했던 미국물리학회에서는, 당시 나의 연구 분야였던 고분자와는 전혀 다른 무기소재 합성에 강한 흥미를 느꼈고, 후에 포스닥 때의 연구 분야가 되었다. 지금 주력으로 연구하는 신축성 전자 피부도, 연구 분야를 정하던 조교수 시절에 우연히 들었던 발표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내가 계획하고 있던 연구 주제에 전자 피부는 전혀 없었으나, 그 한번의 세미나가 나의 지난 10년과 향후에도 지속될 나의 연구 주제가 되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들이기는 하나, 대부분 그러한 몇 번의 예상치 못한 전환점들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예상치 못함’에 대한 기대는 결정이 어려운 선택의 순간에 여유와 자유로움을 준다. 우리가 한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어차피 선택의 순간으로부터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이다. 무엇을 선택하건 그 선택이 중요하다기보다는, 선택 후 어떻게 살았으며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의해 판단된다고 본다. 선택은 절대 대충해서는 안되지만, 그 선택에 발목 잡혀 시간을 허비하는 것 또한 현명하지 않다. 예상치 못함을 기대하면서, 어려운 결정들을 내려야 할 때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은 어떨까? 

5월 7일, 에세이와는 다른 매력의 정운룡 교수님을 만나보세요! 

 

글. 포스텍 신소재공학과 정운룡 교수